성적 불쾌감
넓은 의미에서의 사회적 불쾌감과 더 관련이 깊은 것은 섹슈얼리티, 성적 관계, 그리고 성관계 행위 자체에 관련된 불쾌감입니다. 이성애규범적인 젠더 역할은 출생 시 남성으로 지정된 사람들은 탑을 할 것이고 출생 시 여성으로 지정된 사람들은 바텀을 할 것이다는 기대로 가득 차 있습니다. 이러한 역학은 대중 매체, 독성적 남성성(toxic masculinity), 특히 포르노에 의해 강화됩니다. 심지어 트랜스젠더 포르노에서도 이러한 경향이 나타납니다. (대부분의 트랜스젠더/시스젠더 포르노는 트랜스여성이 탑을 맡습니다.) 이러한 역할에서 벗어나는 것은 종종 파트너와 또래로부터의 수치심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물론, 이 내용은 전혀 절대적이지 않습니다. 그리고 많은 이성애자 시스젠더 커플들도 이러한 틀에서 벗어나고 관계에서 새로운 역학을 찾거나 욕구를 충족하기 위해 여러 성적 취향들을 시도하기도 합니다. 어떤 커플들은 성적으로 전혀 맞지 않음을 깨닫고 다른 파트너를 찾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자기 인식과 탐구를 막는 외부 압력은 매우 많으며, 이러한 요구에서 벗어나는 것은 극도로 어렵거나 심지어 트라우마가 될 수도 있습니다. 특히 보수적 환경이나 종교적 덕목의 배경이 있는 경우에는 더욱 그러합니다.
시스젠더 게이 관계는 필연성 덕분에 이러한 문제를 피해 가며, 개인들이 어떤 역할이 자신을 더 충만하게 만드는지 탐색할 수 있도록 문을 열어줍니다. 어떤 게이 커플은 확립된 지배적/복종적 역학을 가지고 있으며, 이를 서로 이해한 상태로 관계를 시작합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지배적인 파트너를 바꿔치기 하면서 이를 해결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게이 관계는 여전히 부치(butch)/펨(femme), 베어(bear), 트윙크(twink) 역학과 같이 이러한 기대에 얽매일 수 있습니다.
이게 전부 무슨 말일까요? 겉보기에는 이성애 관계로 인식되는 관계에 들어간 트랜지션 이전 트랜스인은 때때로 자신이 성관계에 흥미를 잃게 되는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삽입 행위가 자신이 기대하는 충족감을 주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극단적인 경우에는, 이것이 완전히 잘못된 일처럼 느껴지며 공황을 유발하기도 합니다. 감각 자체는 쾌락적으로 느껴질 수 있지만, 그 경험은 어딘가 어긋나 있으며, 행위 자체가 강요된 것처럼 느껴집니다.
Kathryn Gibes
@TransSalamander Did any other trans girls get to the point pre-transition where they had to basically dissociate in order to top or was that just me lol
이 현상은 트랜스인이 성행위에 덜 열정적이고 심지어는 흥미를 잃게 만들기도 합니다. 성욕의 절반을 구성하는 요소가 상황에 대한 정신적 맥락이기 때문입니다. 많은 트랜스인들은 불쾌감이 모든 성욕을 극심하게 차단하여서 기능적으로 성행위를 회피하는 상태로 지내면서 성인기 이전까지 성행위를 경험하지 않기도 합니다. 파트너를 위해 성행위를 하기도 하지만, 누릴 수 있는 만큼의 즐거움을 느끼지 못하는 경우도 있고, 심지어 그 행위를 해내기 위해 주변 현실로부터 스스로를 분리시키는 상태에 이르기도 합니다.
이 불쾌감은 아주 심각하여 실제로는 자신과 맞지 않는 성적 정체성을 받아들이게 만들수도 있습니다. 커밍아웃 이후가 되어서야 이전에 정체화하던 성적 지향과 전혀 연결감을 느끼지 못했다고 깨닫는 사례도 흔치 않게 들을 수 있습니다. 그 대신 성생활에서 느끼는 불쾌감을 덜 느끼는 수단으로 사용하고 있었던 겁니다.
예를 들어, 어떤 트랜스여성은 트랜지션 이전에 성관계 시 자신을 여성처럼 대해주는 파트너를 갈망하여 게이 남성으로 정체화하였지만 이러한 요구가 충족되고 실제로는 자신이 레즈비언임을 알게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게이 남성으로 살아가고자 시도하지만, 자신의 파트너가 자신을 남자로 인식하고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그 역할이 자신을 충족시키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닫기도 합니다.
강압적인 남성의 시선
저자 노트: 이 특정한 유형의 성적 불쾌감은 일반적인 용어로 설명하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여기서는 방향을 틀어 제 개인적인 경험을 바탕으로 글을 쓰고자 합니다. 다음 내용은 이분법적인 트랜스여성인 제 관점으로부터 서술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트랜스인들에게 공감되지는 않을 수 있습니다. 양해 부탁드립니다.
사픽(sapphic, 여성에게 끌림을 느끼는 모든 여성을 포함하는 포괄적 용어. 레즈비언, 양성애자, 퀴어 또한 포함함.) 공동체에서 잘 알려진 말이 하나 있습니다: “내가 그녀가 되고 싶은 걸까, 아니면 그녀와 함께 있고 싶은 걸까?”
성적 끌림과 선망을 구분하기가 쉽지 않을 수 있습니다. 이는 자신이 벽장 속 트랜스 10대라면 더더욱 그렇습니다. 우리 사회 전체는 이성애를 전제로 구축되어 있으며, 이는 사춘기 이전 아이들조차 남성과 여성 간의 끌림에 대한 메세지에 끊임없이 노출되는 수준으로 단순히 문화적 기본값입니다. 결과적으로, “반대” 성의 삶의 어떤 측면에 관심을 보이는 것만으로도 거의 항상 즉각적으로 성적 끌림으로 받아들여집니다.
그 결과는 무엇일까요? 보통은… 수치심입니다. 트랜스 아동들은 종종 자신의 또래를 자신의 진짜 성별에 기반하여 인식하며, 사람들은 자신과 동등한 사람들을 대상화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그 아이는 성적 대상화를 하는 것으로 보이지 않기 위해 그러한 관심사를 숨기게 됩니다. 이는 아이가 보수적인 종교적 교육 환경처럼 매우 엄격한 규범 속에서 자라났을 경우 더욱 심화됩니다.
복음주의 기독교 가정에서 벽장 속 10대 트랜스인으로 자라면서, 저는 여성을 성적으로 바라본다고 여겨지는 여성을 보는 행동이 발각되기라도 한다면 처벌받게 될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제가 여성 의류를 만지는 모습이 들키기라도 한다면, 제가 답변할 준비가 되지 않은 불편한 질문들이 쏟아질 것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습니다. 이는 여성복, 특히 란제리에 강한 매력을 느끼고 있던 저에게는 심각한 문제였습니다.
모 시즐랙이 거짓말 탐지기 검사를 받는 심슨 가족 클립이 있는데요, 검사가 끝날 때 쯤 모는 시어스(백화점 체인) 카탈로그 속옷 코너에 실린 여성들을 훔쳐보며 밤을 보낼 것이라고 고백합니다. 이 장면의 핵심이자 웃음의 원천은, 이러한 절박한 대상화 행위를 했다는 이유로 모에게 씌어지는 수치심입니다. 저는 제 여성 의류에 대한 관심이 이런 식으로 인식될 것이라는 걸 알면서 자랐습니다.
수치심과 두려움 때문에, 저는 이 열정을 숨기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것들을 했습니다. 제가 자신이 손에 넣을 수 있는 어떤 것들이든 보며 자위하는 10대 소년처럼 다른 사람에게 인식되는 것을 도저히 견딜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 상황을 더욱 악화시켰던 것은, 저 스스로도 내 관심이 성적인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오리 모양의 렌즈로 세상을 보면, 모든 것들이 오리처럼 보입니다. 여성에 대한 저의 관심을 이해하기 위해 저에게 주어진 유일한 틀은 성적 욕구 뿐이었고, 그러므로 제가 가졌던 모든 여성적인 관심사들은 성적 욕망으로 왜곡되었습니다. 신부가 되고 싶다는 소망은 신부 페티시(bridal kink)로 변질되었고, 아이를 가지고 싶다는 갈망은 임신 포르노에 대한 관심으로 왜곡되었으며, 여자가 되고 싶다는 제 자신의 욕구는 변신 페티쉬(transformation fetish)로 방향이 틀어졌습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에 더해서, 저는 제가 다른 여성에게 정당한 성적 관심을 표현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이 너무나도 두려웠습니다. 제 주변에는 여성을 빤히 쳐다보거나 입을 벌리고 넋을 잃고 노려보는 것으로 악명 높은 남성 친구들이 있었습니다. 전 직장 상사는 점심을 먹으러 나갈 때 매력적인 여성을 곁눈질하는 끔찍한 습관이 있었는데, 그와 함께 있는 모습을 보이는 것 조차 매우 불편했습니다.
저는 이런 남성적 시선(male gaze)과 연관되는 것을 도저히 견딜 수 없었습니다. 아무리 아름다운 여성을 마주해도 그들을 쳐다보는 것 조차 피했는데, 여성을 노려보는 그런 사람으로 비춰지는 것이 싫었기 떄문입니다. 포식자(predator)처럼 보이고 싶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강압적인 남성 시선입니다. 이성애중심적 이데올로기로 인해 벽장 속의 트랜스여성들에게 부과된 강제적 이성애인 셈입니다. 자신의 동료들에 대한 감탄이나 젠더화된 관심사를 둘러싼 강렬한 죄책감과 수치심을 불러일으키는 인지 부조화인겁니다.
이 남성적 틀을 벗어내는 순간, 즉 자신을 여성으로 인지하고 이러한 관심사와 관찰이 유효함을 받아들이게 되면, 그 수치심과 죄책감은 증발하듯 사라집니다. 설령 그 관심이 본질적으로 사픽하고 진정으로 성적 욕구를 포함하더라도, 그것은 더 이상 대상화라는 층에 오염되지 않습니다. 이제 저는 제 여성 동료들의 여성성과 아름다움을 판단받지 않고 만끽할 수 있고, 기분 나쁜 사람으로 비춰지거나 제 의도가 오해받는 두려움 없이 그녀들을 칭찬할 수 있습니다.
마침내 해소되기 전까지 말로 표현할 수 없었던 그런 불쾌감이었습니다. 퀴어 여성 공동체에 통합하기 시작하면서, _여성들도 남성들만큼이나 (성적으로) 갈구한다는 것_을 깨닫고 저는 더욱 안도하였습니다. 다만 우리 여성들은 (보통은) 훨씬 더 조심스러울 뿐입니다. 이는 제가 짊어지고 있는지도 몰랐던 죄책감으로부터의 해방이었습니다.